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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蘭汀學術賞 수상자

  • 작성일2016-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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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社)韓國語文會는 4월 28일(木), 蘭汀 南廣祐박사의 국어국문학계에 끼친 공로를 기리기 위한 蘭汀學術賞을 제정하여 제1회 난정학술상 시상식을 개최했다. 제1회 난정학술상 본상에는 李賢熙(서울대)교수가 우수상에는 黃文煥(한국학중앙연구원)교수가 선정되었는데, 사전(4월 21일(목)~22일(금))에 수상자들과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李賢熙 : 서울대 敎授]                                              [黃文煥 : 한국학중앙연구원 敎授]

 

■ 金東鉉(本會 編輯人=이하 金東鉉) : 제1회 蘭汀學術賞을 수상하신 소감을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 李賢熙(서울대 敎授-이하 李賢熙) : 蘭汀 南廣祐 박사를 기리는 제1회 蘭汀學術賞을 수상하게 되어 큰 영광입니다. 난정 선생님의 古語辭典 등 그 業績이 우리 學界에 끼친 영향은 대단하지요.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적은 없지만, 저도 古語를 전공하는 사람으로서 난정 선생님을 私淑하였기에 매우 영광스럽습니다.

■ 金東鉉 : 開化期 또는 近代國語에 대해 연구를 많이 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지요?
□ 李賢熙 : 저는 通時的 연구, 즉 중세국어부터 현대국어까지 이르는 연구를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제 연구의 출발은 중세국어였으나, 점점 근대국어와 개화기국어에까지 외연을 넓혀 왔습니다. 온전한 國語文法史를 기술하려면 개화기와 근대 시기에 대한 연구도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중세국어와 현대국어에 비해 개화기국어와 근대국어 연구자는 상대적으로 적은 편입니다. 때문에 개화기국어에 대한 연구가 굉장히 취약하고, 경어법, 어휘표현 등과 같은 몇 가지 주제 외에는 다루어지지 않은 부분이 많습니다. 개화기국어와 근대국어 시기가 단순히 현대국어로 넘어오는 過渡期 혹은 轉移期라는 편견에서 벗어나, 이 시기 자체가 固有하고 特徵的인 價値들을 매우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 金東鉉 : 개화기의 언어연구가 韓·中·日 三國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찾는 데 도움이 되는지요?
□ 李賢熙 : 개화기 시기는 中國語도 중요하지만, 특히 日本語의 영향력이 증가하는 시기입니다. 일본어 단어를 비롯하여 문장 표현이 우리 신문에 새롭게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漢城旬報와 漢城周報 또한 일본의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와의 일정한 관계 속에서 그 文體가 결정이 되지요. 또, 우에다 가즈토시[上田萬年]라는 동경대학 교수가 일본의 言文一致, 標準語 定立 등의 활동을 하게 됩니다. 같은 시기에 중국도 辛亥革命(1911년) 무렵까지 언문일치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되고, 조선도 마찬가지로 언문일치 등 문체(그 당시는 ‘文法’이라고 함)의 정립에 힘쓰게 됩니다. 개화기는 역동적인 상황 속에서 동양 삼국의 같고 다른 모습을 연구할 수 있고는 가장 좋은 시기입니다.

■ 金東鉉 : 앞으로 더 연구하려는 주제에 대해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 李賢熙 : 역시 語彙 集成이 되어야겠지요. 이제는 고어사전도 기존의 小辭典뿐 아니라 中辭典, 大辭典이 많이 나와야 합니다. 鮮文大學의 朴在淵 교수가 간행한 『필사본 고어 대사전』의 校閱 작업에 저도 관여했었습니다만, 이런 작업이 많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1993년 무렵에 韓國日報와 인터뷰하면서 전반적인 鄕歌 解讀을 하고 싶다는 말씀을 드렸었는데 아직 실천하지 못했습니다. 향가와 차자표기에 대한 공부도 더욱 많이 행하고 싶습니다. 제일 하고 싶은 일은, 통시적 연구를 통해 모든 이들이 쉽게 다가갈 수 있는 國語文法史 단행본을 간행해 내고 싶습니다. 내년 초쯤에 나오지 않을까 싶은데, 앞으로는 단독 저술을 많이 펴내고 싶군요.

■ 金東鉉 : 오래된 대학신문에서 선생님께서 이기문 선생님의 논문 쓰기를 늘 부러워하며 본받으려 하신다는 글을 읽었습니다. 선생님께 이기문 선생님의 영향은 어느 정도였는지요? 그리고 영향을 끼치셨던 恩師님이 계시다면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 李賢熙 : 이기문 선생님께서 학계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지요. 국어사를 매우 풍성하게 만드셨고, 엄청난 연구량을 깔끔하고 깊이 있게 정리해 내시니, 정말 본받고 싶은 분입니다. 1989년 무렵 震檀學報에 제 논문이 실린 적이 있는데, 이기문 선생님께서 강의 시간에 제 글을 복사해 학생들에게 읽게 하시고 칭찬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굉장히 기뻐했던 기억도 나는군요. 그리고 제 學脈이랄까 學統을 이야기하자면, 一石 李熙昇 선생님과 心岳 李崇寧 선생님의 제자로 李基文, 金完鎭, 安秉禧 선생님 등이 계셨고 저는 안병희 선생님의 지도학생이었습니다. 굳이 저에게만 초점을 맞추자면 이숭녕 선생님, 안병희 선생님, 저 이렇게 학맥이 내려오는 셈이지요. 언젠가 韓國學報에서 이숭녕 선생님, 안병희 선생님, 저 이렇게 3대가 좌담회를 했으면 하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심악 선생님께서 건강이 안 좋아지셔서 入院을 하시는 바람에 무산이 됐습니다만, 그 자리에 나가게 됐다면 매우 큰 영광이었을 텐데 아직도 아쉬움으로 남아 있습니다.

■ 金東鉉 : 1988년부터 서울대학교에 재직하고 계십니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학생이거나(학부, 대학원 포함) 보람을 느끼셨던 적이 있으시다면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 李賢熙 : 國語國文學科 學生이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因緣을 맺는 사람을 먼저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1996년 무렵, 여름방학 계절학기 강의를 윤기정이라는 미생물학과 학생이 수강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성균관대 유전공학부 교수로 있으면서 아직도 自筆로 매년 年賀狀을 보내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 지도학생 중 일본 유학생이었던, 지금은 도야마[富山] 대학에 재직 중인 조호 사토시[上保敏] 교수가 생각나는군요. 태어날 때부터 힘들게 태어났고, 어려운 신체 조건을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한국어를 연구하고 싶어 서울대학교에 유학을 온 친구였습니다. 제가 2006년 동경대학에 가 있을 때 비행기 표를 사 들고 일본에 찾아와 결혼식 主禮를 부탁해 주례를 서기도 했습니다. 그 뒤로 박사학위도 받고, 시호(しほ)라는 딸도 낳고 잘살고 있는데, 힘든 逆境을 이겨낸 사람이라 그런지 볼수록 자랑스럽습니다. 그리고 서울대뿐 아니라, 제가 1983년 3월부터 1988년 8월까지 한신대학교에서 재직했는데 그때 가르친 학생들이 기억납니다. 근 30년이 지난 지금도 졸업생들이 꾸준히 연락을 해 오고 만남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정말 자랑하고 싶습니다.

■ 金東鉉 : 교수님의 좌우명이나 인생철학이 궁금합니다.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 李賢熙 : 농담 삼아 말씀드리면 ‘엉덩이 무겁게’입니다. 강의를 오래 하다 보니 많이 변하긴 했지만, 아직도 內省的인 면이 많은 편입니다. 그러다 보니 대인관계를 많이 가지기보다 한 자리에 오래 앉아 있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엉덩이 무겁게 공부하고 연구하다 보면 가끔 좋은 結果도 따라오곤 하더군요. 모든 성과는 ‘엉덩이 무겁게’의 결과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 金東鉉 : 국어문법사나 古語를 연구하려는 젊은 연구자들에게 꼭 해 주고 싶으신 말씀이 있다면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 李賢熙 : 요즘 고어를 전공하려는 사람, 학생들이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漢字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고어 자료들은 純國文으로 된 것도 있지만 그런 자료는 아주 드물고 한자가 대부분 섞여 있습니다. 한자에 대한 부담감을 떨치고 다가가야 합니다. 그리고 개화기시기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만, 저는 젊었을 때 일본어와 중국어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던 것이 무척 아쉽습니다. 학부생 여러분들께서는 서양어뿐 아니라 우리 인근의 언어들, 일본어와 중국어 공부도 열심히 하셨으면 합니다. 그래야 더욱 풍부한 논의와 연구를 할 수 있습니다.

■ 金東鉉 : 제1회 난정학술상을 수상하셨습니다. 수상하신 소감을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 黃文煥(한국학중앙연구원 敎授-이하 黃文煥) : 갑작스럽게 선정 통보를 받으면서 당황스러운 마음이 앞선 것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난정학술상 첫 회 수상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영광스러우면서도 제가 과연 이 상을 받을 자격이 될까 하는 의구심도 들더군요. 지난 연구 생활을 돌아보니,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가 된 이후 줄곧 諺簡資料 연구에 집중하여 『역주서』(2003/4권, 2009/10권), 『서체자전』(2012/2권), 『판독자료집』(2013/3권), 『입문서』(2015), 『어휘사전』(2016예정/5권, 역락출판사) 등의 결과물이 이어졌는데 이러한 점을 평가해주신 것인가 싶습니다. 이러한 성과들은 제 힘으로만 이루어낸 것이 아니라, 연구팀 전체가 이루어낸 결과이기 때문에 이 상은 연구팀 전체에게 주는 激勵의 意味라 생각됩니다. 

■ 金東鉉 : 國語史를 전공하게 되신 특별한 계기가 있었는지요?
○ 黃文煥 : 성균관대학교 1학년 때 박양규 선생님의 강의가 굉장히 재미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조사 ‘에게’와 ‘께’의 차이가 歷史的으로는 관형격 ‘의’(有情物 아래)와 ‘ㅅ’(無情物 아래)의 구별에 기반을 둔 것이라는 說明을 하셨는데요. 그속에서 “사람을 가리키는 尊稱의 명사가 왜 ‘의’가 아니라 ‘ㅅ’과 통합할까?”, “그럼 ‘尊待’의 본질이 무엇일까?”하는 질문들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질문 탐구를 통해 예전에는 가져보지 못했던 ‘아는 만큼 보게 되는 知識의 힘’에 강렬한 興味를 느꼈던 듯싶습니다. 

■ 金東鉉 : 조선시대 언간에 대한 연구 사업에 주력하셨는데, 조선시대 언간자료의 가치 및 활용방안에 대해 설명해주십시오.
○ 黃文煥 : 언간자료는 번역에서 가장 벗어나 있는 자료이기 때문에 언해자료 위주의 국어사 연구를 補完할 자료로서 우선 가치가 있습니다. 또한, 王에서부터 庶民들까지 개인의 생생한 日常이 담겨 있어 각 분야의 역사자료로서도 언간은 굉장히 소중한 자료입니다. 다행스럽게도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학자료센터에서 언간자료에 대한 웹서비스를 준비 중입니다. 그동안 알려진 언간의 원본 이미지는 물론 판독문, 현대어역, 어휘주석, 해설을 함께 제공할 예정입니다. 多方面에서 活動하시는 분들이 언간자료를 자유롭게 活用할 수 있으므로, 앞으로 다양한 연구와 스토리텔링에 적극적으로 활용될 것으로 전망합니다.

■ 金東鉉 : 어제류 문헌들을 비롯한 문헌자료와 근대국어 자료를 譯註하는 작업에도 참여하셨습니다. 역주 작업의 목표와 의의는 무엇인지요?
○ 黃文煥 : 한국학중앙연구원 藏書閣은 ‘王室 圖書館’ 성격을 지녀 왕실과 직간접으로 관련된 한글자료가 다른 어느 곳보다도 풍부합니다. 그러나 이들이 모두 고어로 되어 있고 그마저도 심하게 흘려 쓴지라 학계나 일반에서 활용되기 위해서는 판독 및 역주가 시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자료들은 앞으로 조선후기 왕실의 言語와 文化를 연구하는 데 핵심자료가 될 것으로 전망합니다. 

■ 金東鉉 :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석박사 과정을 마치시고, 현재까지 교수로 오랫동안 재직하고 계십니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학생이거나(학부, 대학원 포함) 보람을 느끼셨던 적이 있으시다면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 黃文煥 : 무엇보다 제자들이 학계에 진출하여 활발한 활동을 펼치는 것을 볼 때 참 보람을 느낍니다. 외국인 학생 중에는 중국의 유효홍 선생 박사논문이 "국어학총서’(訓民正音의 文字 轉換 方式에 대한 硏究/2014)로 선정되기도 했는데요. 韓國人이 연구하기도 어려운 주제인지라, 굉장히 苦生하며 논문을 썼습니다. 선정 소식을 전해 왔을 때, 제자를 눈물로 축하해주고 격려해주던 기억이 나는군요.

■ 金東鉉 : 앞으로 더 연구하려는 주제에 대해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 黃文煥 : 어휘 사전을 편찬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漢字語’였습니다, 한자어의 語源과 풀이에 대해 마땅히 참고할 사전이 없어 힘들었습니다. 『韓國漢字語辭典』은 한문 문헌에 쓰인 한자어를 대상으로 하였고, 『標準國語大辭典』은 표제어로 삼은 한자어 가운데 用例를 제시하지 못한 경우가 상당수였죠. 한글 문헌에 등장하는 한자어를 體系的으로 蒐集하고 整理하는 작업이 시급하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현재로서는 ‘物名’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정미가례시일기 주해』(2010)를 통해 왕실 발기에 나타나는 물명을 다룬 바 있고, 최근에는 유희의 『物名考』 譯解(2014~2016)를 학제 간 연구로 진행 중입니다. 물명 데이터베이스를 통해 물명에 대한 정리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지면, 물명 검색 및 활용이 飛躍的으로 改善되는 것은 물론 물명을 중심으로 한 ‘물명의 문화사’와 같은 연구 주제도 새롭게 注目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 金東鉉 : 선생님께 영향을 끼쳤던 恩師님이 계시다면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 黃文煥 : 송기중 선생님과 이광호 선생님이 생각나는군요. 두 분 선생님은 저에게 學問的 父母이십니다. 송기중 선생님께는 연구하는 방식, 客觀性 등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이광호 선생님께서는 항상 제자들을 품어주시고, 부족한 점이 있어도 토닥여주시곤 하셨죠. 학위논문 지도를 맡아 주셨던 이익섭 선생님께서는 사람을 아낄 때 어떻게 아껴야 하는지를 몸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학위논문 이후, 김일근 선생님을 자주 뵈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엄밀한 考證과 같은 學問的 면모뿐 아니라 사람을 진심으로 대하는 마음의 방식이 남다르셔서 기억에 두고두고 남습니다.

■ 金東鉉 : 교수님의 좌우명이나 인생철학이 궁금합니다.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 黃文煥 : 특별히 좌우명을 지니고 살아오지는 않았으나, 한 格言이 생각납니다. 2008년 미국 코넬대학에 방문학자로 갈 당시, 김일근 선생님께서 주신 선물이 있었습니다. 1960년 11월 4일 펄벅 여사(코넬대 출신)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중국 격언을 자필로 써서 남긴 것인데요. “어둠 속에서 불평만 하고 있기보다는 차라리 한 자루 촛불을 켜는 게 낫다”는 말이 쓰여 있었습니다. 주변 환경을 탓하기보다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것을 始作하자는 그 뜻이 마음에 와 닿아 항상 마음속에 새기고 있습니다.

■ 金東鉉 : 젊은 연구자들에게 꼭 해주고 싶으신 말씀이 있다면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 黃文煥 : ‘학제 간 疏通力’을 키워 나가기를 당부합니다. 언간과 물명 연구를 수행하면서, 각 분야 분들과의 소통이 굉장히 중요함을 느꼈습니다. 국어사자료는 언어자료인 동시에 當代의 문화를 종합적으로 反映하고 있는 자료이므로, 각 분야에 대한 理解가 필요합니다. 또한, 기쁨은 나누면 나눌수록 배가 되는 것과 같이 ‘疏通’하다 보면 결국 연구의 ‘재미’가 커지고, 그러다 보면 더욱 큰 ‘보람’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