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회 蘭汀學術賞 受賞者 인터뷰
- 작성일2024-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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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賞: 曺永福(光云大學校 敎授) 優秀賞: 李京洙(中央大 敎授)
■ 朴善主(本誌 編輯人 - 이하 朴善主): 제8회 蘭汀學術賞 本賞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 曺永福(光云大學校 敎授 - 이하 曺永福): ‘蘭汀學術賞 本賞’ 을 받게 된 것은 무엇보다 감사 하고 또 감사한 일입니다. ‘蘭汀學術賞’ 수상의 이 찬란한 시간을 저에게 許與해 주신 남광우 선생님 유족분들과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노력도 天稟임을 고고하게 내세운 朴泰遠 의 경구를 빌리자면, 저는 학문의 천품도 노력의 그것도 타고나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학문의 재주가 疏略하고 얕기 그지없음을 뒤늦게 알아챘지만, 이미 학문의 초입에 들어섰으니 별다른 방도가 없어 홀로 고군분투해온 것인데 제 여력이 닿는 한까지 학문의 왜소와 노력의 빈곤을 성실하게 메우라는, 이 재주 없는 저를 딱하게 여기신 심사위원 선생님들의 격려와 채찍이 아닐까 제 멋대로 짐작해 봅니다. 게으름이 저의 빈곤한 정신을 타고 올라올 때마다 “채찍을 잊지말라(니체)”는 이 알뜰하고 따뜻한 가르침을 가만가만 돌이켜 보겠습니다.
■ 朴善主: 한국근대시 분야를 집중적으로 연구하시게 된 계기는 무엇인지요.
□ 曺永福: 俗惡하고 비루하기 그지없는 저의 욕망에 대한 보상심리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는 無用하고 無欲해서 빛나는 것들이 있습니다. 가령 음악이나 시 같은 것들이 그렇겠지요. 더욱이 ‘말’ 에는 일일이 서툰 저의 천성도 한몫하지 않았나 합니다. 입 열고 눈 열어 ‘산문의 시대’를 마주할 능력도 자신도 없었던 것인데 ‘산문의 언어’를 넘어설 그 무엇인가가 저에게 절실했던 것이지요.
■ 朴善主: 선생님께서 2021년에 현대미술관 주최의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의 전시 기획에 참여하시게 된 동기가 있으시면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 曺永福 : 예술에 대한 딜레땅드(dilettante) 기질이 저에게 없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른바 천성은 프롤레타리아트인데 취향은 부르주아라 학부시절 내내 살아내기 쉽지 않았습니다. ‘이곳에 서는 살 수 없음’이라는 보헤미안적인 명제가 정신의 유목민을 만들었던 것 같은데 사교성없고 남루했던 제가 겨우 찾은 ‘실존의 집’이 근대의 예술(가들) 에게 닿았던 것입니다. 이념의 무게와 부조리한 삶에 대한 청춘시절의 불안이 강박적으로 저를 조여왔던 것에 대한 반응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어찌되었든 괴테마냥 로마가 전세계의 최고의 학교라는 믿음 하나로 이탈리아기행을 떠나기에는 거기까지 이르는 차비가 없었고 토마스만의 주인공 토니오크뢰커마냥 인류 정신문화의 기원이자 예술의 근원인 그리스를 航行하기에는 용기가 부족했지요. “파리에 갈거야” 하고 입버릇처럼 중얼거렸던 이상마냥 ‘파리’는 그저 문학을 존재 증명하는 메타포일 따름이었지요. ‘몰래바이트’로 모은 돈을 클래식음반을 사고 화집을 사는데 쏟아부었습니다. 그 언저리쯤 <조선일보>에 월북예술가들, 월북지식인들의 행로를 연재할 기회가 있었고 그 결과물이 월북예술가 오래 잊혀진 그들(2001)입니다. 골방에 틀어박혀 낡은 근대잡지를 뒤적이는 취향을 버리기에는 저는 그다지 사교적이지 못했습니다. 청춘의 나이에 ‘독거노인’ 처럼 살게 된 것이지요. 제가 좋아하는 근대시들, 예컨대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의 소유권은 백석에게만 있지 않았고 삽화가이자 장정가인 정현웅에게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문, 잡지 紙面은 글만을 오롯이 담아내는 文字容器이기보다는 근대화가들의 풍경 스케치나 인물 드로잉 등 아름다운 그림들을 펼쳐둔 ‘紙上 캔버스’이기도 했던 것이었습니다. ‘畵文’ 의 발견이었습니다. ‘화문’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학문적으로 실재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이 낯선, 글과 그림의 混鐘樣式에 ‘이름’ 을 붙여주게 된 것이지요. 어설픈 저의 딜레땅뜨가 ‘고향’을 찾은 기분이랄까 뭐 그런 것이었습니다. 넘다, 보다, 듣다, 읽다-1930 년대 문학의 ‘경계넘기’와 ‘개방성’의 시학(2013)이 출간되었고 이를 계기로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 전시의 문학부문 기획을 담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현대미술관과 협의를 하면서도 이 막강한 디지털 시대에 누가 지루하고 낡은 ‘책시대’ 의 유물들, 퇴적물들을 보러오겠는가, 저 스스로 懷疑를 벗지 못했지요. 그런데 놀랍게도 ‘세대차이’를 뛰어넘은 관람객들의 발길이 끝없이 이어지더군요. ‘코로나시대’에 사람들이 문득 길을 잃은 것인지, 세대를 초월해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책’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습니다. 제 학문에 대한 확신이 부족한 저로서는 삶에 대해서도 그다지 낙관적이지 못한 편인데, 당시 마스크가 막은 것은 저의 ‘입’이 아니라 저의 ‘시대감각’이었을 것입니다.
■ 朴善主: 선생님의 현대문학 연구에 영향을 주었던 은사님과의 기억을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 曺永福: 한국문학에 대한 기본적인 안목을 길러주신 대학 은사님들이 생각납니다. 그 누구보다 시적인 감수성을 품고 계시면서도 ‘시나부랑 이론’을 펼치셔서 시전공자들에게 뼈아픈 좌절을 안겨주곤 하셨던 김윤식 선생님, 근대시사를 올곧게 정리해 후학들에게 시사적 안목을 지니게 해 주셨던 지도교수이신 김용직 선생님, 그리고 저희들 곁을 떠나가신 대학 은사님들의 빈자리를 메워주고 계신, 제 1학년 때의 지도교수셨던 권영민 선생님과 저의 ‘모지리한’ 성격을 不問曲直하고서 늘 저를 격려해 주시는, 대학원 근처에서 함께 공부했던 선배 선생님들-형(兄)들과의 ‘인생공부’도 제 공부에는 큰 도움이 되었다고 감히 말씀드립니다. 그럼에도 제 학문의 출발점에 이기문 선생님이 계셨다고 말씀드리면 다소 의아하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현대문학 전공자에게 국어학 전공 스승이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자연스런 논리’의 귀결일 수는 없을 터이니까요.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춥고 고달팠던 것 같습니다. 졸업을 코앞에 두고 있었지요. 사회는 소란했고 어지러웠으며 내면은 참혹한 불덩어리 하나 품은 듯 냉담하게 타올랐지요. 그럴수록 이성은 얼음칼처럼 삭막하고 건조한 정신의 날을 벼리었습니다. 말하자면 사회에 나가 밥벌이를 해서 온전한 생활인으로 살아야 할 출발점에서 저는 삶의 방향성을 잃고 헤매었던 것입니다. ‘서울로부터의 도피’를 말하기에는 저의 감수성이 유난히 幼稚했던 시절이기도 했는데 어쨌든 그 때 저는 아마 남쪽 어느 고립된 지역의 변방에 머물고 있었을 것입니다. 김용직 선생님께서 전화를 하셨고 이기문 선생님 곁에서 일을 도와드리는 것이 어떻겠냐 말씀하셨던 것 같습니다. 자연스레 이기문 선생님께서 소장으로 계셨던 <국어연구소>에 ‘입사’ 를 한 것이지요. 제가 그러니까 ‘직장인’ 이 된 것이었습니다. 첫 출근을 했더니 이기문 선생님께서 그 까마득하게 어린 제자를 앞에 앉혀두시고 “대학원을 가서 학문을 해야지!”, 따뜻하지만 엄격함이 고스란히 배인 음성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거기서 당신 일을 도우면서 대학원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지요. 전공 공부에는 손을 아예 놓은 채 시를 쓰네, 평론을 하네 어줍잖게 달려들다 판판이 깨지는 날의 연속이 국문학도의 삶이었던 시절이었습니다. 하고자 하는 자의 의욕을 끊고 잘난 듯이 덤벼드는 자의 날쎈 칼을 무딘 나무토막으로 만들어버리는 악당들과 그 악당들을 냉소와 치기로 날려버리는 자멸파들이 그 시절 그 구역의 至尊들이었지요. 국어학 분야 전공학점을 채워야 했기에 졸업을 앞둔 학기에 어쩔 수 없이 이기문 선생님의 국어사 강의를 수강하게 되었습니다. 일종의 ‘전략과목’ 분위기였을 것입니다. 어영부영 한 학기를 마무리 할 즈음, ‘대학문학상’ 시부문에 당선되었는데 종간호 <대학신문> 지면에 수상소식과 함께 제 얼굴이 조그맣게 실리게 되었지요. 신문을 보신 이기문 선생님께서 강의실에 들어오시더니 저를 ‘콕 집어서’ “아, 자네였군!” 하시면서 다소 감회 어린 표정을 지으셨습니다. 당시 선생님들은, 국어학 전공자이든 문학 전공자이든, 모두 다 한 때는 ‘문학청년’ 이었을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이기문 선생님께서는 「素月詩의 言語에 대하여」(1983) 등 시전공자들이 참조해야 할 문학관련 논문을 남기기도 하셨지요. 저의 수상 소식을 신문에서 보시고 아마 당신의 ‘문청시절’을 문득 떠올리셨을 터입니다. 이기문 선생님과의 이 작고 사소한 인연이 후일 국어학전공 선생님들과의 인연으로 이어졌습니다. <蘭汀學術賞>과의 인연의 실마리는 어쩌면 아주 엉뚱한 데서 풀리고 있었던 것 아닐지요. 당시 <국어연구소>에서 국어학 전공 선생님들을 뵐 수 있었습니다. 맞춤법개정이나 국어 정책 관련된 회의들이 자주 열렸기 때문입니다. ‘말단 가운데서도 말단’을 차지했던 저로서는 거기 들르시는 ‘대(大)선생님들’께 직접 인사를 드릴 기회는 없었습니다. 먼발치서 존경과 감탄의 염을 담아 세상 유례없는 예의 바른 자세로 선생님들을 맞고 선생님들의 돌아가시는 길을 배웅했던 기억이 납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마 남광우 선생님의 인상을 제가 강력하게 가지고 있는 것은 그 즈음의 기억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蘭汀學術賞>의 ‘계기’를 마련하신 강신항 선생님도 아마 그 때 뵈었던 것 같습니다. 작고 사소한 인연들이 이렇게 한 자리에 있다는 사실이 새삼 경이롭습니다. 근대시 연구의 숱한 오류와 부진의 길을 돌아 최근에는 우리말, 조선어구어, 한글문장체 같은 이른바 ‘국어학 영역’에 문학적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우연이 아닐 듯합니다.
■ 朴善主: 현대시를 전공하는 젊은 연구자들과 후학들에게 한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 曺永福: 온갖 말들이 세상천지를 흉흉하게 떠다니는 시대입니다. 입의 荊棘이 시의 말을 가로막고 삶의 진지한 말들에 갖은 생채기를 내는 시대입니다. 삶은 항상 불확실하고 불안정하며 미래는 불투명하기 그지없습니다. 시는 삶보다 어쩌면 더 불확실하고 불명확하며 그 어떤것도 결정적으로 단언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시는 가차없이 수와 양과 통계에 저항할 수 있는 물건일 수 있습니다. 가장 불확실하고 가장 모호할지라도 그리고 스스로 모순된 말의 굴레에 결박되어 있다해도 -보통 ‘은유’라 지칭합니다만- 시는 그 자체로 이 속악하고 비루한 삶에 등을 돌린 채 우리의 시선을 저 먼 곳으로 한 걸음 떼어 놓게 하지요. 무용해서 유익하고 무욕하니 유장한 것이 시고 저는 이런 시연구를 선배들로부터 배웠고 또 동료, 후배 연구자들과 함께 시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보다도 훨씬 더 섬세하고 진지한 눈으로 시를 들여다봐야 합니다. 적어도 연구자로서는 기존 논의에, 유행하는 담론에 서둘러 몸을 기탁할 이유나 필요는 없습니다. 거창한 이론 혹은 방법론으로 한국문학 텍스트를 주변적인 것으로 만들어서도 곤란하겠지요. ‘외국(문학)이론:한국문학텍스트’ 와 같은 ‘선험적 이분법’이 여전히 한국문학연구의 자의식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외국이론’의 그 성성하고 맛깔 난 담론들은 ‘한국문학의 방법론 구축’이라는 명분 아래 한국문학텍스트 자체를 소외시키거나 한국문학의 존재 자체를 위축시키는 계기로 작동합니다. 하지만 그 ‘방법론’은 사치하기는 하나 공허하기 그지없고 ‘이론’이라는 허약한 기둥은 메아리없는 독백으로 텍스트의 심연에 가라앉고 말지요. 저로서는 그 뼈아픈 경험들이 문득 근대시의 기원으로 저의 시선을 되돌리게 한 요인이 되었습니다만. 지식인의 책무를 가장한 연구자로서의 지적 게으름을 물리칠 수 있는 겸허함과 성실함도 간간이 필요하지요. ‘SNS’에 날선 말을 쏟아내며 이 세상의 모든 부조리와 허위에 맞선 자로서의 지식인의 초상은 어느덧 자신의 탐욕과 비루를 숨기는 가면이 되기도 하던가요. 학문은 지루하고 연구는 시시해집니다. 문학연구자라는 것이 이제는 이 같은 시류를 폭풍처럼 마주하고 서 있는 위기의 존재자들처럼 보입니다. 학문에의 기여가 검은 뿔테안경을 끼고 스스로 학자임을 내세우는 데 있지 않고 미디어가 주도하는 담론에 기생하면서 유행하는 시류의 언어를 멋지게 모방하는 데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행하는 법을 배울 수는 있어도 인생을 사는 법을 배우기는 어렵듯, 방법론은 모방해도 인간을 이해하기는 어렵지요. 인간이해가 시해석의 가장 중요한 토대이며 문학 연구자로서의 첫 발걸음임은 말할 것도 없지요.
■ 朴善主: 계획하고 계신 연구 작업이 있으면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 曺永福: 얼어붙은 손가락이 허락하는 한 죽은 아버지의 영생부와 망자의 책을 베끼는 어떤 시적 이미지의 강렬함이 저를 붙들어 매고 있습니다. 우리 근현대사의 ‘실재했으나 표현되지 못한, 기록되었으나 망각된’ 시간과 인간에 대해 생각하는 중입니다. 이런류의 관심이란 무상한 삶에 대한 저항이자 공인된 기록에 대한 항거이기도 하지요. 알파벳의 음절 하나조차 알아보기 힘들게 낡아버린 아버지의 기록물을 뻣뻣하게 굳은 손가락으로 베끼던 딸은 “어떤 형태의 위안이건 위안은 있다”는 투로 말합니다. 한 인간의 삶이 쓸데없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과, 삶의 모든 고통을 기록하면서 인간적인 실존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늘 존재했다는 것을 그 기록들은 증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의 전공은 근대시 어쩌면 일종의 근대문헌학에 가 닿아있습니다. 월북예술가, 지식인들에 대한 글도 썼고 이런 저런류의 ‘평전’ 에도 참여했습니다. 이 나이 들도록, ‘학문’의 영역은 궁극적으로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지구, 제 실재하는 삶과는 거의 관련이 없는 ‘책’ 속의 세계, 관용적으로 말해도 위대한 인물들의 지나간 역사의 흔적들을 찾는 과정쯤으로 알았습니다. 제 학문의 공식적 이력이 다 끝나가는 이 시점에서야 겨우 저는 그 역사와 인물이 제 주변, 제 육친, 제 아버지, 제 어머니의 삶 한 가운데 있다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야속하게도, 어리석게도 말입니다. 철들지 못했던 탓이지요. 우리 근현대사에서 사라져 버린 일상인들, 망자들의 기억을 더듬어 그들의 시간과 인간을 복원해 내는 작업을 하고 싶습니다.
■ 朴善主: 제8회 蘭汀學術賞 優秀賞을 수상하셨습니다. 수상하신 소감을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 李京洙(中央大 敎授-이하 李京洙): 현대시 연구자로 아직 해야 할 연구도, 쓰고 싶은 책도 많고 갈 길이 멀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蘭汀 南廣祐 선생님의 뜻을 기리는 의미의 난정학술상을 수상하게 되어 기뻤습니다. 올해가 현대시 연구자로서 제게는 의미있는 해여서 미리 激勵를 해 주시는구나 생각했습니다. 5년여의 시간을 바쳐 준비한 『정지용 전집』 을 비롯해서 오래 학문적으로 교류해 온 여성문학 연구자들과 협업한 『여성문학선집』, 그리고 여섯번째 비평집 등이 올해 출간될 예정이고, 이용악 연구서도 준비하고 있어서 몇 년간 注力해 온 연구의 결실을 조금은 보여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난정학술상 우수상 수상이 제게는 더 뜻깊게 다가 왔습니다.
■ 朴善主: 현대문학을 연구하시게 된 계기는 무엇인지요.
○ 李京洙: 많은 분들이 그렇겠지만 저도 문학이 좋아서 국어국문학과에 들어갔고 대학에 입학할 때부터 대학원에 가서 학업을 계속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대학 시절에는 한문반이라는 학회에서 활동하면서 아침 8시부터 한 시간 동안 매일 대학, 논어, 맹자, 중용 강독을 했고 현대문학뿐 아니라 국어학이나 한문학에도 관심이 있었지만, 어려서부터 좋아했던 문학에 대한 꿈을 놓칠 수 없어서 현대문학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대학교 3학년 무렵부터 시를 창작하는 선후배 동료들과도 어울리게 되었고 많은 시인들의 시집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현대문학중에서도 현대시 전공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대학시절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관심도 깊이 가지고 있어서 부전공이나 복수전공을 한 것도 아닌데 강만길 교수님의 수업을 다 수강하기도 했거든요. 동시대의 시와 소설에도 관심이 많았고 오늘의 문학에 대한 문제의식을 투영해 근현대시를 다시 읽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도 현대시 전공으로 자연스럽게 저를 이끈 것 같습니다. 1988년 월북 문인에 대한 解禁 조치가 이루어지면서 읽게 된 백석이나 이용악, 정지용 같은 시인의 시에 매료된 것도 현대시 전공을 선택하는 데 조금은 작용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 朴善主: 선생님이 주로 연구하시는 현대문학 분야는 무엇인지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 李京洙: 박사 논문은 「한국 현대시의 반복 기법과 언술 구조 -1930 년대 후반기의 백석·이용악·서정주 시를 중심으로」라는 주제로 썼습니다. 현대시 연구에서는 형식과 내용 연구가 분리 될 수 없다고 생각했고 많은 시인들의 시에 나타나는 반복 기법이 우리 현대시의 리듬을 특징 적으로 보여준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게 현대시의 기법과 형식에 대한 연구를 시작으로 현대시 연구자로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이후로도 시의 종결어미라든가 문체적 특징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한동안은 한국현대문학사에 우뚝 선 주요 시인들을 연구 대상으로 삼아 지속적인 연구를 해 왔습니다. 근대 초기부터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시인들에 대한 연구를 진행해 왔지만, 그중에서도 백석, 이용악, 서정주, 정지용, 임화, 김수영, 신동엽, 고정희, 최승자, 김혜순, 허수경 등의 시인에 대해 주로 연구를 진행해 왔습니다.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書誌的 연구나 文獻考證的 연구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다시 읽는 백석 시, 이용악 전집 같은 전집류를 공들여 출간하면서 서지 연구, 문헌고증적 연구의 중요성을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백석 시의 경우, 당대 자료의 편집이나 인쇄 상태가 다소 불완전하다 보니 연구분이나 시행의 길이를 판단할 때 연구자의 해석적 판단이 개입할 수밖에 없고 평북 정주 방언을 비롯해 고어나 사라진 말 같은 시어가 자주 등장해서 語釋 연구도 중요하거든요. 전집 출간 작업을 하면서 기존 전집의 오류를 바로잡거나 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기도 했습니다. 또 한 가지 주된 연구 분야는 여성시에 대한 연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현대시 연구자로서 살아오면서 근대 초기의 나혜석, 김명순, 김일엽을 비롯해 김남조, 홍윤숙, 고정희, 최승자, 김혜순, 허수경 등 여성 시인들에 대한 연구도 꾸준히 해 왔습니다. 올해 근대 초기부터 1990년대에 이르는 여성 작가의 시, 소설, 희곡, 비평 등의 작품들을 선별해 묶은 여성문학선집이 나올 예정인데요. 이 책을 함께 준비하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여성 시인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고 싶습니다.
■ 朴善主: 2021년 연구서 『백석 시를 읽는 시간』을 집필하시게 된 동기는 무엇인지요.
○ 李京洙: 오랫동안 백석 연구자로서 많은 논문을 써 왔습니다. 박사학위논문은 백석에 대한 단독 논문은 아니었고 반복 기법이라는 뚜렷한 주제를 가지고 있는 논문이라 박사논문을 쓴 후에도 백석 시에 대해 연구하고 싶은 주제가 많았습니다. 백석 연구자들 중에는 백석의 在北 시기 시에 대해서는 가치를 인정하지 않거나 연구를 꺼리는 분들도 있지만, 백석은 재북 시기 이전에는 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시가 아닌 다른 글로 披瀝하지는 않은 시인이었거든요. 재북 시기에 백석이 쓴 아동문학평론에는 백석의 시에 대한 생각과 그의 문학적 苦鬪가 담겨 있어서 이 시기 백석의 문학적 산물을 모른 척할 수는 없었습니다. 동화시 창작자로서의 백석과 번역가로서의 백석에 대해서도 더 연구가 진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사실 백석에 대한 연구를 오래하게 만든 힘은 백석 시 특유의 언어와 형식적 특성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거예요. 오늘날 읽어도 백석 시는 낡았다는 느낌을 주지 않고 이질적인 존재들이 만들어 가는 連帶의 힘을 아름답게 보여주기도 하고 지금은 사라진 공동체의 가능성을 상상하게 하기도 하지요. 그런 주제들에 대해 논문을 쓰다 보니 어느새 책 한 권의 분량이 되었는데 그사이 저는 다른 연구 주제로 관심사가 擴張되거나 이동하기도 해서 백석 시에 대한 연구를 정리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책으로 묶게 되었습니다.
■ 朴善主: 2022년 여러 권의 저서를 출간하셨습니다.
○ 李京洙: 김수영에 관한 세 권의 공동 저서 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좋다, 김수영에서 김수영으로, 애타도록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는 2021년 김수영 시인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면서 김수영에 대해 글을 쓸 기회가 많아져서 나오게 된 책입니다. 김수영연구회에서 김수영의 시와 산문을 오래 읽어오기도 했고요. 2021년에 김수영 시인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간의 연구 성과를 여러 연구자들과 묶게 되었는데 공동 작업이다 보니 좀 늦어져서 출간 시기가 2022년이 된 것입니다. 아직 오지 않은 시 - 포스트휴먼 시대 시의 미래는 중앙대학교 인문콘텐츠연구소에서 HK+ 사업의 일환으로 쓰게 된 책인데요. 인공지능 시대, 포스트휴먼 시대로 불리는 시대에 시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고 시 교육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 고민하면서 중앙대 대학원에서 현대시를 전공하는 젊은 연구자들과 함께 집필한 책이에요. 제자들과 함께한 작업이라 제게는 더 소중하고 의미 있는 작업이었습니다. 페미니즘 리부트 시대, 다시, 고정희는 2021년 고정희 시인의 30주기를 맞이하면서 20주기와 30주기 학술대회에서 발표된 여러 연구자들의 논문을 묶어 책으로 낸 결실입니다. 고정희의 시와 문학을 다룬 단독 연구서이자 국문학 연구자뿐만 아니라 외국문학 연구자들도 참여했다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가 있는 책입니다.
■ 朴善主: 선생님의 현대문학 연구에 크게 영향을 준 은사님과의 기억은 무엇인지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 李京洙: 학부 2학년 때 현대시를 전공하는 교수님이 학과에 오셨고 3학년 때부터 수업을 들었는데 열정적으로 학생들에게 기회를 열어주는 선생님이셨습니다. 당시 안암문예창작강좌라는 것을 열게 해 주셨고 그때 많은 시인들을 만나서 특강도 듣고 이야기도 나누고 했던 것이 대학원에서 현대시를 전공하는 데 영향을 주었던 것 같아요. 선생님과 선후배 동기들과 창작 여행도 함께 다니고 했던 기억도 납니다. 서구의 이론에 傾倒되기보다는 한국의 현대시를 읽을 수 있는 주체적인 관점이나 방법을 고민해 온 데도 모교 은사님들의 영향이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요즘은 현대시를 전공하는 학문 후속세대를 위해 저의 세대 연구자들이 해야 할 몫이 있다는 생각을 종종 하며 살고 있습니다.
■ 朴善主: 앞으로 계획하시고 있거나 연구하시고 싶은 작가나 작품에 대해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 李京洙: 정지용 전집을 준비하면서 정지용의 발굴 산문을 꽤 찾기도 했고 그의 산문을 다시 읽고 있는데요. 정지용은 좋은 시인이자 교육자였고 틀에 갇힌 고리타분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정지용의 산문에는 그의 인간적 매력이 잘 드러나 있는데요. 정지용 전집을 출간한 후에는 정지용의 시와 산문에 대한 연구를 좀 더 수행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남은 연구 인생 중에 한국 근현대 여성시와 시인에 대한 서지 자료들을 수집하고 여성시문학사를 집필하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사실 저는 제 연구의 종착지를 文學史 敍述이라고 생각하는 거의 마지막 세대가 아닐까 싶은데요. 여성시문학사를 서술한 후에는 젠더적 관점에서 한국 현대 시문학사 를 새롭게 집필하려는 꿈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아울러 대학원 제자들과 몇 권의 책을 공동으로 집필할 계획을 가지고 준비 중에 있기도 합니다.
